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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평
공연과 전시를 깊이 있게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의 리뷰와 비평(25년 재단 비평지원사업 발굴 콘텐츠)

파인다이닝

A Recipe of Care and Memory: Kim Mi-ran's <Fine Dining>

Review 글쓴이 최우정

돌봄과 기억의 레시피: 김미란 작·연출 〈파인다이닝〉

돌봄과 기억의 레시피

김미란 작·연출 〈파인다이닝〉

 

타인에게 즉각적인 행복을 선물할 수 있는 직업은 미용사, 요리사,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생각은 ‘나의 손길로 웃음 짓는 손님의 얼굴을 곧바로 볼 수 있어서 기쁘다’는 단골 헤어 디자이너의 말에서 떠올렸고, 두 번째 생각은 냉혈한 음식 평론가 안톤 이고가 생쥐 레미의 요리를 한 입 먹고 유년 시절의 추억에 잠기는 영화 〈라따뚜이〉(2007)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떠올렸다. 세 번째 생각은 낯선 오지에서 자신을 응접한 가족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와, 이국의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여러 행인들의 미소를 자아내는 첼리스트의 모습에서 떠올렸다. 이 직업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한한 몸으로 유한한 것을 빚어서 타인에게 건넨다는 점이다. 머리칼은 자라고 음식은 소화되며 노래는 흩어지지만, 기묘하게도 인간의 감각에 제일 깊숙이 각인되는 건 이처럼 소멸하는 행위들이다. 몸으로 시작해 몸으로 안착하는 경험은 돌봄의 원형—돌봄은 “기술인 만큼이나 예술이며, 요령인 만큼이나 전문적인 역량”이다(매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 2022[2020])—과 닮아있으며, 그것을 아로새긴 사람의 비언어적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무른다.

 

“여러분은 지금, 종로 반쥴에 계십니다. 

사실 니벨룽겐은요. 저의 아버지 김영학 씨가 

근무하셨던 경양식 레스토랑의 이름이에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기 반쥴은 항상 이 자리에 있었어요. 

벽돌 사이사이에 깃들여 있는 사람과 시간, 

그리고 기억을 품은 채로요. 여러분들도 느껴지시죠? 

그 시간들 사이 어딘가에 아버지의 시간도 흐르고 있었어요.”

 

연극 〈파인다이닝〉(김미란 작·연출)의 관객은 익숙한 극장이 아닌 ‘종로 반쥴’의 4층으로 초대된다. 1974년에 문을 열어 반세기 동안 카페 겸 레스토랑, 예술 공간으로 운영돼 온 이 건물은 사라진 양식당을 복원하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장소다. 천장에 고정된 핀 조명은 한때 찬란했을 전성기를 비추는 달빛처럼 반짝이고, 식당 홀—물론 여기는 관객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기도 하다—처럼 꾸며진 객석은 허구의 연극보다는 실제의 역사 속으로 입장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배우 3인 중 한 명인 딸 김미란(하지은 분)과 이 극을 쓰고 연출한 김미란의 이름이 같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런 일치는 눈앞의 무대가 “살기, 공부하기, 사랑하기, 배우기가 서로 맞물려 있는 실천”(로런 포니에, 『자기이론』, 2025[2021])의 장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벽면 곳곳에 스며든 기름기와 손때 묻은 집기들은 치열한 노동의 흔적이 구체적인 물질과 장소에 새겨져 있음을 선연히 드러낸다. 그렇게 관객은 앞으로 제시될 부친의 일대기가 곧 개인의 서사를 넘어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어떤 공통의 얼굴임을 직감하게 된다.

 

▲ 김미란 제공, © 한희석

 

김영학(성노진 분)의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부를 법한 ‘니벨룽겐’ 시절, 그의 기술은 장인의 예술에 가까웠다. “힘줄이랑 근육을 적당히 잘 끊어줘야” 돈가스가 골고루 펴진다는 원칙이나, 빵가루 하나를 던져 적절한 기름 온도를 찾아내는 직관은 그가 주방의 지휘자로 존경받던 자부심의 근거였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사회적 효능감을 갖는 것은 ‘좋은 삶’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조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른바 프랜차이즈의 시대가 도래하자, 장인의 가치는 효율과 자동화의 물결에 밀려 빠르게 사라진다. 모든 조리 과정이 본사의 지침대로 표준화된 외식업에서 영학의 숙련성은 비싸고 불필요한 고집으로 치부될 뿐. 어느새 그의 일터는 단순 반복의 굴레—‘공장에서 냉동으로 나오면 덥혀주고, 전자레인지에 돌려주는’—에 빠진 컨베이어 벨트와 다를 바 없다. 사람이 대접받던 시대는 끝났다고, 당신 아니어도 “알바”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선포하는 자본은, 영학에게서 주방장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 김미란 제공, © 한희석

 

이렇듯 극은 동시대 ‘노동의 비극사’를 생생히 그리되, IMF를 통과한 중년 남성의 얘기에만 갇히지 않는다. 그의 경력이 탄탄대로를 달리던 나날의 이면에는, 그림자처럼 가사노동을 전담해 온 아내 경연(백은경 분)의 억눌린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평생을 인정을 못 받고 산다. 평생을!”—연극에서 ‘인정’은 유달리 비중 있게 반복되는 단어인데, 이로부터 우리는 노동이 경제적 필요뿐 아니라 타인의 인정이라는 상징적 필요까지 충족하는 수단임을 되새겨 봄직하다—이라고 거듭 외치는 그녀는 철저히 유예되어야 했던 중년 여성의 욕망—꼭 한 번 합기도 도장을 차리고 싶었던—을 환기시킨다. 둘의 근면성과 부채감을 물려받은 미란을 보자. “나처럼 살지 말라”며 대학을 두 번이나 보내준 그들의 헌신은 역설적으로 딸의 마음을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 끊임없이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지 못하면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 부모의 희생에 보답할 만한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미란은 멈출 수가 없다. 그러니까 세대를 넘어 순환하는 묵직한 화두는 이것이다. “왜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일까.”

 

▲ 김미란 제공, © 한희석

 

그럼에도 잊지 말자. 〈파인다이닝〉은 인간이 지닌 창조성을 긍정하며 생산과 소비의 회로망 바깥을 상상한다는 것을. 게다가 매체의 본질—연극은 사람이 모이는 예술이다—을 영민하게 활용한다는 것을.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통찰을 빌리자면, 영학이 고기를 두드리는 ‘노동’과 미란이 공연을 만드는 ‘작업’은 연극이라는 공동의 세계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행위’로서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극의 말미에 ‘진짜’ 김영학이 등장할 때, 무대는 과거를 재현하는 곳이 아닌 현재를 살아내는 장소로 거듭나고, 관객의 미각은 서사적 공감보다 한결 원초적인 층위에서 그의 인생과 접속한다. “잘 살았네, 우리 김영학 씨.” 이것은 배우의 대사이자 ‘진짜’ 김미란의 발화이며, 기억 저편의 누군가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인사다. 즉, 누군가를 먹이고 돌보며 성실히 자기 자리를 지켜온 존재들에게 보내는 헌사다. 마침내 경양식 돈가스가 놓인 〈파인다이닝〉의 식탁에 마주앉은 관객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I’m fine, thank you. And you?”

레이디 맥도날드

The Dignity of a Life No One Takes Responsibility For: <Lady McDonald>

Review 글쓴이 최서율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 삶의 존엄 <레이디 맥도날드 Lady Mcdonal’s>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 삶의 존엄

<레이디 맥도날드 Lady Mcdonal’s>

 

 

사람들이 빠르게 들고나는 맥도날드. 손님들 그 누구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얼른 눈앞의 음식을 먹고 자리는 떠나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조급한 일면을 보여 주는 맥도날드에서 느긋하게 영자 신문을 읽는 윤자(곽지숙)의 모습은 단연 이질적이다. 윤자는 급한 일이 없다는 듯 신문과 성경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뿐이다. 윤자의 시간은 무대 오른편 기둥에 걸린 시계를 통해 가시화된다. 윤자 외의 등장인물들이 전자시계의 시간을 리모컨으로 바꾸며 시간의 경과를 보여 준다.

 

윤자의 하루는 ①교회, ②스타벅스, ③문화원 내부의 영화관, ④맥도날드를 옮겨 다니며 전개된다. 집이 없다는 윤자에게는 세상이 집이다. 가는 곳마다 윤자가 하는 행동도 정해져 있다. 교회에서는 기도를 한 뒤, 권사가 기도실 한편에 올려둔 봉투에서 돈을 꺼내 생활비로 쓴다. 스타벅스에서는 매일 아침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버터를 듬뿍 넣어 마신다. 문화원 내부의 영화관에서는 고전 일본 영화를 즐긴다. 해가 지면 맥도날드로 가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신문을 읽거나 성경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레이디 맥도날드>(원작 한은형, 각색·연출 이지혜, 예술공간 혜화, 2025.12.1.~7.)는 윤자의 삶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 <레이디 맥도날드> 무대 사진. (제공: 이지혜 연출)

 

<레이디 맥도날드>는 소설가 한은형 원작의 『레이디 맥도날드』를 각색한 작품이지만 현실을 본 뜬 것에 더 가깝다. 작품 속 레이디 맥도날드는 실존 인물 권모 씨를 통해 탄생한 캐릭터다.1) 지난 2010년 12월, SBS에 ‘맥도날드 할머니’라고 소개된 권모 씨는 매일 서울 정동의 맥도날드 매장에 나타나 잠을 자고 영자 신문을 읽는 생활로 화제가 되었다. 그가 입었던 빛바랜 트렌치코트는 극 중 윤자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상식이라는 단어는 상대적이고, 파괴적이고, 기만적이다.

모두의 상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 『레이디 맥도날드』2) 중

 

윤자는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찾아온 방송국 PD 중호(최문혁 분)에게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문제가 드러나서는 안 되며 때때로 자신에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중호가 윤자의 조건을 수락한 이후 둘은 촬영을 위해 이따금 만나는 친구가 된다. 윤자의 삶이 매일 반복되다 보니 무대 역시 소품의 변주를 통해 윤자의 하루를 드러낸다. 맥도날드나 스타벅스는 자석으로 떼고 붙일 수 있는 작은 종이 간판을 활용해 구분된다. 문화원의 영화관은 무대 왼편에 앉은 윤자가 황홀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는 것으로 처리된다. 윤자로 분한 곽지숙은 <몰타의 유대인>(2024)과 <어느 날 문을 열고>(2025)를 통해 연기력을 입증한 연기파 배우다. 소리로만 제시되는 영화의 음성과 곽지숙 배우의 표정이 조화를 이루어 관객 역시 영화관 안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곽지숙 배우의 연기력은 영화관에서뿐만 아니라 윤자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주’라는 경멸적 애칭을 지닌 윤자는 평생을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았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믿고자 했던 윤자의 진심이 객석에 오롯이 전달된다. 특히, 중호와 식사를 하기 위해 방문한 고급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윤자가 손을 씻는 장면은 진심이 극대화되는 부분이다. 울음을 터트릴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는 윤자의 표정에 선택한 삶을 고스란히 이겨내고자 하는 애환이 묻어 있다. 윤자의 애환은 기쁨이기도, 일부는 후회이기도 할 것이다.

 

▲ <레이디 맥도날드> 무대 사진. (제공: 이지혜 연출)

 

그러나 <레이디 맥도날드>가 끝내 묻는 것은 윤자의 삶이 ‘얼마나 존엄한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질문은 그 반대편에 놓여 있다. 윤자는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될 수 있었을까? 교회, 프랜차이즈 카페, 문화원, 패스트푸드점은 모두 윤자를 쫓아내지 않지만, 책임도 지지 않는다. 무대는 모호한 관용의 공간들을 나열함으로써 보호도 배제도 아닌 상태로 존재하는 인간의 자리를 드러낸다. <레이디 맥도날드>가 담담한 이유는 윤자가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더 이상 그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나아질 수 없는 삶을 목도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현실적인 여러 상황 앞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구조 속에서 사는 것을 택하게 된다. 반면에 윤자는 구조 속에서 벗어난 삶을 산다. 퇴직금을 모으지도 결혼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노인 보호 센터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차분히 즐거움을 위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무대 위 윤자는 ‘어느 노인’으로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윤자는 20대나 30대일 수 있다. 숨 막힐 듯 빠르게 변화하는 삶 앞에서, 그리고 더는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은 인간의 나약함 앞에서 누구나 윤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지난 2018년 개봉한 영화 <소공녀>에서도 그려진 바 있다. 그러나 <소공녀>가 쓸쓸한 시대의 자화상을 보여 주는 데 그친다면 <레이디 맥도날드>는 윤자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죽음은 영원한 안녕을 뜻한다. 이는 윤자의 삶이 더는 바뀔 수 없음을 표현한다. 미래가 없다는 것, 그리고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보는 시간에 따라 상당한 공포를 동반할 수도 있다. 무대는 윤자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표현한다. 이는 선택한 삶을 살았던 윤자의 존엄성에 대한 형상화로 보인다. 몇 년 사이, 현실은 더욱 치열해졌다. 윤자를 추억 속에 빠져들게 했던 영화 속 일본은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프리터족(freeter族)이 매년 늘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취업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누구나 윤자가 될 수 있는 삶 앞에서 윤자의 서사는 더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윤자의 죽음은 비극도, 사건도 되지 않는다. 무대는 이를 애도하지 않고 문제 삼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변화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레이디 맥도날드>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불편한 연극이 되어 버린다. 존엄한 선택으로 포장된 죽음은 동시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죽음이 된다. 윤자의 삶이 존중받았다는 인상과 달리 그의 죽음은 사회가 가장 익숙하게 처리해 온 방식으로 소비된다. 조용히, 빠르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윤자의 유령이 늘어가는 지금, <레이디 맥도날드>를 무대 위의 이야기로만 볼 수는 없다.

 

1) 하종훈 기자, 「‘공주병 노숙자’ 맥도날드 할머니, 비웃을 수만은 없었던 별종의 삶」, 『서울신문』, 2022.04.01.

2) 한은형, 『레이디 맥도날드』, 문학동네, 2022.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A Travelogue in Search of Myself, the Power of a Simple Stage: <Catching Up with Angelina Jolie>

Review 글쓴이 최서율

나를 찾는 여행기, 단출한 무대의 힘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나를 찾는 여행기, 단출한 무대의 힘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사랑하는 많은 여성들과 이 흉터를 공유한다.

다른 여성들이 자신의 흉터를 공유하는 걸 볼 때마다 항상 감동받는다.

검진과 치료에 대한 접근성은 재정 상황이나 거주지에 따라 좌우되어선 안 될 것이다.”1)

 

  지난 15일(현지 시간), 배우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는 타임(TIME) 프랑스 창간호에서 유방 절제술 흉터를 공개했다. 그리고 유방암 예방과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랑하는 많은 여성들’과 유방암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젤리나 졸리는 유방암과 난소암 발생 확률을 높이는 BRCA 유전자 변이를 지니고 있어 2013년에 선제적 절제술을 받았다. 그러나 타임지 표지에 실린 안젤리나 졸리의 가슴은 수술을 받기 전과 차이가 없다. 이는 그가 절제술 이후 재건술을 받았기에 그렇다. 유명한 스타의 행보는 종종 대중에게 하나의 기준으로 작동한다. 다소 위험이 따르거나 어려운 일이더라도 ‘그 스타 또한 성공했더라’ 등의 경험담이 공유되면 안정성이 검증된 일처럼 여겨지게 된다.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이수민 작, 이라임 연출, 신촌문화발전소, 2025.11.20.~22.)는 암으로 가슴을 잃은 여성들의 고민담을 꺼내 놓는다.

 

▲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무대 사진. (제공: 프로젝트 졸리)

 

  여성의 몸을 호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가슴’이다. 가슴은 모유가 생산되는 성스러운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때로는 섹슈얼한 여성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중적 시선이 존재하는 가슴은 여성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신체 조건이 되었다. 크기가 클수록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 문솔(김민주 분)은 유방암으로 인해 가슴을 절제했지만 ‘매력적인 신체를 지닌 여성’이라는 상징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슴 재건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보형물 삽입 수술과 관련된 다양한 위험이 문솔의 마음을 자꾸만 어지럽힌다.

 

  평생 착용하는 장치가 아닌 유방 보형물은 많은 경우 추가적인 수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에 오래 자리했을수록 합병증 발생의 가능성을 높인다. 또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들에게 보형물 수술이 얼마나 안전한지 연구된 적이 없으므로 어쩌면 ‘미지의 공포’를 안고 있는 수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문솔은 수술을 고민한다. 이는 ‘여성의 미(美)’를 골자로 하는 산업 이데올로기의 강요 탓이기도 하다. 의사(이주협 분)는 절제술 후에 곧바로 재건술을 받는 환자들도 있다며 절제술의 후속 절차가 당연히 가슴 재건술인 양 말한다. ‘잃어버렸다’면 ‘되찾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의 ‘여성 가슴 문법’은 유방암 수술을 앞둔 여성들에게 하나의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문솔은 가슴 재건 수술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에 가입해 카사-블랑카(신소연 분)와 앙코르-와트(이아라 분)를 만난다.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되찾을 가슴에 붙인 별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사-블랑카의 경우 가슴 각각의 이름이 ‘카사’와 ‘블랑카’인 셈이다. 카사-블랑카는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미국에서 수술을 받으려 했으나 이내 포기한다. 이유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가슴 재건술과 관련된 엄청난 부작용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사-블랑카는 문솔과 그의 언니(김현빈 분)와 줌(ZOOM)으로 소통하며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러면서 앙코르-와트와는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는지 질문한다.

 

▲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무대 사진. (제공: 프로젝트 졸리)

 

  앙코르-와트는 결혼을 앞둔 여성으로 가슴 재건 수술을 받은 이후 더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 않는다. 앙코르-와트의 이야기는 무대 위에서 꿈처럼 재현된다.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는 올해 3월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되었을 때는 무대 뒤편의 안젤리나 졸리의 얼굴을 형상화한 표정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가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검고 둥근 조형물 두 개가 무대 양옆에 설치된 채였다. 그러다 보니 꿈의 재현 양상도 스펙터클했다. 재연이 진행된 신촌문화발전소는 좁은 계단식 객석 아래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아기자기한 무대로 구성된 극장이다. 그렇다 보니 초연보다는 무대가 간소해졌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무대가 단출해진 만큼 이야기의 응집력은 더욱 커졌다. 좁은 무대의 답답함은 전동 스크린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적나라한 가슴 형태가 아닌 둥근 쿠션형 소파를 여러 개 배치해 안정감을 가미했다. 그렇다 보니 가슴을 잃은 등장인물들을 자꾸만 좇아오는 안젤리나 졸리의 이미지나 여성들의 꿈들이 실감 나지는 않더라도 집중력 있게 객석으로 닿을 수 있었다.

 

  앙코르-와트에게 가슴 재건 수술은 앙코르와트(Angkor Wat)와 같은 사원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원 건립을 위해서는 무수한 피를 흘려야만 한다. 대가가 필요한 사원 건설이 과연 누구를 위한 사원 건설이었느냐고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는 묻는다. 신체를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타자화 시켜 사원처럼 보이게끔 만든 것은 누구의 탓인지에 관한 것 또한 첫 질문 아래 숨어 있다. 앙코르-와트가 더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사원의 의미를 다시금 체감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일 테다.

 

  여성의 신체는 대타자가 되어 말해지고는 한다. 올해만 해도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외에 <마른 여자들>이 몸무게와 관련된 서사를 무대 위에 가져온 바 있다. 이전보다 응집력 있어진 무대에서 봐야 할 것은 ‘안젤리나 졸리’의 가슴이나 가슴 재건술의 위험 같은 것이 아니다. ‘나’를 찾는 여성들의 여행기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봐야만 한다. 여성의 신체가 대타자화되었다든가, 여성성은 정치성의 산물이라든가 하는 페미니즘 담론은 때로 “너무 많이 이야기되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이 이야기된 그것들이 너무 당연해지는 순간에야 여성들의 ‘나를 찾는 여행기’가 종결되지 않을까.

 

1) 이윤정 기자, 「안젤리나 졸리, 유방 절제술 흉터 공개 “여성들과 상처 공유”」, 『레이디 경향』, 2025.12.17., lady.khan.co.kr.

2) 박고은·천혜정, 「여성의 가슴은 어떻게 소비되어 왔는가?: 여성잡지 브래지어 광고 분석」, 『미디어, 젠더&문화』 34,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9, 54~58면.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

Feeling Out Strange Signs Until They Become Dance - Jung Daseul Foundation's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

Review 글쓴이 강부민

낯선 기호를 더듬어, 춤이 될 때까지_정다슬파운데이션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

낯선 기호를 더듬어, 춤이 될 때까지_정다슬파운데이션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

 

춤은 흔히 사라지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끝나는 순간, 춤은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 속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흐르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아두려는 오랜 욕망이 있다.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기어이 어딘가에 새기고, 적고, 남기려는 태도. 북한의 무용 서적 『무용표기법』 또한 그러한 보편적 열망의 산물일 것이다. 그들은 춤이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불완전한 방식 대신, 자모(字母)를 결합한 표기법을 통해 춤을 영원히 고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다슬파운데이션의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이하 <PINK>)는 남한의 안무가가 이 견고한 믿음의 체계가 담긴 책, 『사관장과 전사들』을 우연히 마주하며 시작된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를 과거의 유물을 복원하거나, 단절된 세계를 엿보려는 시도로 읽는다면 우리는 기호 너머에서 발생하는 내밀한 춤의 층위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이라는 특수한 장소가 아니라, 춤을 책(물질)에 담을 수 있다고 믿었던 태도와, 그 책을 다시 몸으로 읽어내려는 남한 무용수들의 현재적 시간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진: 전소영 @audiovisualunion

 

안무가에게 이 오래된 책은 도서관의 진열장에 놓인 사료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수행되어야 할 일종의 스코어(Score)로 다가온다. 김재리의 논의를 빌리자면, 안무의 과정에서 아카이브는 과거를 보존하는 저장소가 아니라, 창작을 위한 재료(Material)로서 현재를 활성화하는 도구이다.1) 텍스트로 고정된 북한의 춤은 남한 무용수들의 몸을 통과하며, 박제된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는 현재적 사건으로 전환된다. 무용수들이 책에 적힌 낯선 기호들을 해독하고, 자신의 몸을 그 기호에 맞추어 보려는 노력은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지시하는 움직임을 오늘의 감각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에 가깝다.

 

이 번역의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오차와 마주한다. 원본 영상이 부재한 상황에서, 무용수들은 오직 텍스트라는 불완전한 지도를 들고 춤을 찾아 나선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번역을 원작의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원작이 새로운 언어와 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남도록 하는 ‘사후의 삶’을 부여하는 일이라 말한 바 있다.2) 표기법이 지시하는 정확한 각도와 호흡이 무엇인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용수들이 텍스트를 더듬거리고, 때로는 오독하며 찾아낸 그 움직임들은 원본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생생한 몸의 언어가 된다.

 

사진: 전소영 @audiovisualunion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감각의 재배치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사관장’이나 ‘전사’라는 제목, 그리고 북한이라는 맥락은 우리에게 경직되고 집단적인 춤을 상상하게 한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우리가 텍스트와 역사를 바라보는 고정된 감각의 분배(le partage du sensible) 방식일 것이다.3) 그러나 무용수들이 기호를 하나하나 몸으로 옮겼을 때, 그곳에는 비장한 이념 대신 의외의 모던함과 소소한 일상성이 놓여 있었다. 기록된 문자는 분명 어떤 목적을 지시했을지 모르지만, 이를 수행하는 무용수들의 몸은 그 지시 너머에 있는 순수한 움직임의 질감을 발견해낸다. 이는 예술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교란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의 경험을 열어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서로 다른 매체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상호매개성(Intermediality)의 지점에서 더욱 선명해진다.4) <PINK>에서 ‘책’이라는 고정된 매체와 ‘춤’이라는 유동적인 매체는 서로 충돌하고 미끄러진다. 책은 춤을 규정하려 하고, 신체는 그 규정된 틀 안에서 꿈틀거린다. 무용수들이 책을 사이에 두고 움직임을 상의하는 과정은 춤이 신비로운 영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과 해석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매체 간의 사이 공간에서, 납작했던 종이 위의 춤은 입체적인 부피를 얻는다.

사진: 전소영 @audiovisualunion

 

결국 <PINK>는 무언가를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기록의 열망과, 춤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 여기는 수행의 태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제목의 ‘PINK’는 붉은색이라는 이념의 색도, 흰색이라는 순수의 색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피어나는 중간 지대의 색채처럼 보인다. 우리는 끝내 텍스트가 가리키는 원본 춤에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펼치고 무용수들이 몸을 움직이는 그 시간 동안, 단절되었던 시간은 연결되고 낯선 타자의 몸짓은 관객의 감각으로 들어온다.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텍스트의 행간을 상상력으로 메우며 춤을 추어내는 일. 그 조심스러운 마음씀이야말로, 어쩌면 동시대의 예술이 남겨야 할 아카이브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장은 덮여도 춤은 남는다. 비록 그것이 원본과 다른 모습일지라도, 그 차이 속에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 했던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사진: 전소영 @audiovisualunion

 

1) 김재리,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현재성: 컨템퍼러리 무용의 실천을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 제44호, 2017, 186-189쪽 참조. 김재리는 이 글에서 아카이브가 고정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신체와 안무적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화(actualization)되는 수행적 실천임을 강조한다.

 

2) 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발터 벤야민 선집 6), 최성만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08, 185-187쪽 참조. 벤야민은 이 글에서 번역이 단순히 원작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원작이 역사 속에서 변화하며 계속 살아남게 하는 ‘사후의 삶(Fortleben)’을 부여하는 과정임을 역설한다.

 

3) Jacques Rancière,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Paris: La Fabrique, 2000. 랑시에르는 공동체 내에서 무엇이 보이고 들리는지, 누가 말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감각의 분배 방식을 논한다. 예술은 이러한 고정된 분배를 재편하여 새로운 주체와 감각을 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4) 구보미, 「컨템퍼러리 댄스의 상호매개성(Intermediality): 몸-아카이브의 형성을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 제62호, 2021, 6-7쪽 참조. 상호매개성은 서로 다른 매체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텍스트(책)와 신체(춤)라는 이질적인 매체가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미적 긴장감을 설명하기 위해 참조하였다.

개인전, 뭐 하지?

The Purple Butterfly Dancing While Waiting for Godot: On Kim Hak-ryang's 'The Road to You'

Review 글쓴이 박예린

고도를 기다리며 춤추는 보라나비: 김학량의 '그대에게 가는 길'에 대하여

고도를 기다리며 춤추는 보라나비: 김학량의 '그대에게 가는 길'에 대하여

 

김학량의 개인전 《개인전, 뭐 하지?》(2025.12.12-2026.1.18, 아마도예술공간)의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은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무대 위에 던져진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수십 년간 작업을 지속해 온 중견 작가가 자신의 방향성을 향해 무심하게 던지는 이 질문은, ‘완결된 결과물’이라는 박제된 허상을 좇기보다 예술가로서의 실존적 흔들림을 가감 없이 노출하겠다는 베케트적 선언에 가깝다. 그는 명쾌한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전시장이라는 시골길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 그 자체를 전시의 주인공으로 소환한다.

 

작가가 첫 개인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붙들고 온 주제인 ‘그대에게 가는 길’은 목적지를 향한 직선적 항해가 아니라, 바람에 떠밀려 표류하는 갈대와 수양버들의 유연한 유랑을 닮아 있다. 여기서 그가 상정하는 ‘그대’는 특정 대상이기보다, 작가가 평생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지향점 혹은 타자와의 원형적 연결을 상징한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소멸해버릴 ‘그리움’의 농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어딘가에 뿌리 내리기를 거부하며 의도적으로 길 위를 부유한다. 이러한 미완의 여정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속 풍경과 겹쳐진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며 황량한 시골길을 서성이듯, 김학량은 《개인전, 뭐 하지?》라는 질문을 통해 해답이 부재하는 예술적 유예의 상태를 실존의 양식으로 선언한다.

 

[그림 1] 김학량, 〈강산무진: 그대에게 가는 길〉, 2020, 배접지에 수묵, 목탄, 각 40 × 136cm. 아마도에술공간 제공.

 

이 지점에서 전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실존적 상태 그 자체를 작업의 방법론이자 결과물로 수용한다. 베케트의 인물들이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 김학량 역시 반듯하지 못한 아마도예술공간의 공간들을 이리저리 유람하며 ‘낙서’와 ‘드로잉’이라는 대화법으로 실존을 확인한다. 특히 도로와 접한 1층 전시실의 통유리창에 덧발라진 파란 필름은 전시장 안팎을 서로를 들여다보는 거대한 ‘수족관’으로 치환하며, 관객을 어항 속 낙지나 해삼과 다를 바 없는 실존적 관찰자의 위치로 전치시킨다. 이곳에 길게 늘어진 〈강산무진: 그대에게 가는 길〉의 시커먼 북한 잠수함 내부 묘사와 벽면에 박제된 듯 걸린 간첩의 유류품 드로잉에는 그 어떤 감정적 과잉도 없이, 그저 분단 한국의 현대사를 건조하게 응시하는 실존적 관찰자로서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림 2] (왼쪽부터) 

김학량, 〈두근두근 내 인생: 머뭇머뭇, 어두컴컴, 휘청휘청, 두근두근, 조마조마, 횡설수설, 우물쭈물, 우왕좌왕, 노심초사, 흔들흔들〉 (이상 스테인드글래스체), 〈어리버리, 혼비백산, 허둥지둥, 어영부영, 갈팡질팡, 어물어물, 기웃기웃〉 (이상 창살체), 2025, 창에 아크릴릭, 가변 크기.

김학량, 〈문방육십사우〉, 2025, 널찍한 탁자에 갖가지 도구, 장비, 재료, 잡동사니를 올려둠, 120 × 240cm. 아마도예술공간 제공.

 

중견 작가로서 작가가 마주한 실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으나, 그 외양은 역설적으로 경쾌하게 드러난다. 중년의 문턱에서 겪는 갱년기의 어지럼증과 방황은 전시 곳곳에 ‘두근두근’, ‘우왕좌왕’과 같은 의태어로 흩뿌려져 있다. 작가는 이 삶의 허무를 엄숙하게 비통해하는 대신, ‘보라나비’나 ‘도깨비불’, ‘수족관 속 낙지’ 같은 위트 있는 장치로 비튼다. 특히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을 새긴 뒷모습 드로잉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을 미술 제도권의 모순과 충돌시키는 지점으로, 위트와 해학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작가 특유의 조형 언어가 지닌 비평적 힘을 보여준다. 

 

[그림 3] (왼쪽부터) 

김학량, 〈광장〉, 2025, 색연필, 마커, 잡지 콜라주, 25.7 × 18cm

김학량, 〈광장〉, 2025, 색연필, 마커, 잡지 콜라주, 25.9 × 20.9cm

김학량, 〈광장〉, 2025, 색연필, 마커, 잡지 콜라주, 25.7 × 18cm

김학량, 〈광장〉, 2025, 색연필, 마커, 잡지 콜라주, 25.9 × 20.9cm

아마도예술공간 제공.

 

이러한 태도는 매체의 변주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작가는 스스로를 ‘낙서하는 사람’이라 낮추어 부르며, 기념비적 오브제 대신 버려진 철사, 구리 전선, 전시 홍보 엽서 등을 주된 매체로 삼는다. 미술 제도의 욕망이 묻은 부산물인 갤러리 리플릿과 도록 위에 낙서를 휘두르는 행위는 비판적 전유의 관점에서 제도 비판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허수룩하고 사소한 것들을 통해 우주의 무게를 견디려는 구도자적 자세를 견지한다. 베케트의 부랑자들이 누더기를 걸치고도 인간 존엄의 본질을 건드리듯, 김학량은 가장 비천하게 보이는 재료로 현대 서화의 새로운 격(格)을 재구성해낸다.

 

[그림 4] 김학량, 〈자생란〉, 2024, 전시용 와이어, 길에서 주운 녹슨 철사, 시멘트, 난석, 화분, 가변 크기. 아마도예술공간 제공.

 

전시의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다시금 묻는다. “우리 인제 어디로 가요?” 베케트의 인물들이 “자, 갈까?”라고 말하고도 끝내 움직이지 않았던 것과 달리, 김학량은 보라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그에게 있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기에 평생 나서야 할 먼 길이다. 시작할 때에도, 길을 가는 중에도, 그리고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할 때에도 여전히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다스려가며 그는 춤을 춘다. 결국 이 전시는 목적지에 닿지 못한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오랫동안 길을 걸어 온 나이 지긋한 예술가가 삶을 긍정하려는 씩씩하고 즐거운 시도인 듯했다.

DMZ에 땅을 사람들 심포지엄

From 'Our Wish' to 'My Desire': The Secular Modern History Driven by the Impure Energy of <People Who Buy Land in the DMZ>

Review 글쓴이 박예린

'우리의 소원'에서 '나의 욕망'으로: 《DMZ에 땅을 사는 사람들》의 불순한 동력으로 달려온 세속의 현대사

'우리의 소원'에서 '나의 욕망'으로:

《DMZ에 땅을 사는 사람들》의 불순한 동력으로 달려온 세속의 현대사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낸 비무장지대(DMZ)의 가치는 오랫동안 생태적, 외교적, 군사적 맥락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기획자 이혜원은 실제 DMZ 토지를 매수한 지인의 사례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지점에서 출발하여 이 불가침의 성역이 어떻게 자산으로 유통되는지를 추적한다. '발품'을 팔 수 없는 이 기묘한 '부동산'은 위성사진과 지번이라는 추상적 데이터로만 '임장'할 수 있으며, 도래하지 않은 통일 '프리미엄'이라는 경제적 기대와 욕망이 중첩되어 기괴한 가격표를 형성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전시를 구성한 기획자와 작가들이 이러한 사회적 문법을 누구보다 투명하게 내면화한 90년대생 전후의 세대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과거의 집단주의적 서사가 파산한 자리에서 태어나, 역설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생존 방식을 호흡하며 자라났다. 유년기에는 IMF 외환위기를, 청소년기에는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목격하며 '어디에 사느냐'가 곧 계급의 증명으로 직결되는 과정을 뼈아프게 지켜본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집과 땅은 더 이상 정주(定住)를 위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 언제든 수익률로 환산될 수 있는 자산, 즉 '부동산'이라는 호칭으로 더 익숙하게 다가온다. 한국 경제의 과열된 부동산 투기 행위가 분단이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조건과 결합된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묘한 발현'으로서, 전시는 DMZ의 토지 거래라는 현상을 분석한다.

 

[사진 1] 반재하, 〈정산 없는 시장〉, 2025, 9채널 실시간 데이터 수집·처리 시스템, 가변 설치, 가변 크기. 《DMZ에 땅을 사는 사람들》 (A-O-Y, 서울, 2025) 전시 전경, 사진: 직접 촬영.

 

전시는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어떻게 폭력적으로 세속화되고 추상화되는지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반재하의 〈정산 없는 시장〉은 DMZ 토지 거래를 선물지수와 리스크 스프레드가 요동치는 거대한 금융 대시보드로 재구성한다. 주식이나 가상 화폐 시장처럼 군사적 긴장과 정책 기조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이 '유령 시장'은, 통일과 평화라는 가설적 미래를 담보로 수익을 약속한다. 작가는 파편화된 변수들을 매끈한 데이터로 치환함으로써, 분단과 휴전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정치적 상황을 정교하게 관리 가능한 객관적 수치인 양 기만적으로 전시하는 시장의 속성을 폭로한다.

 

반면 이정은 〈8 Lands, 8 Keepers〉를 통해 그 숫자의 뼈대 위에 세속적 욕망의 살을 붙인다. 한반도의 8도를 연상케 하는 여덟 채널의 영상 속 QR 코드는 관객을 온라인 부동산 매물의 과잉된 수사로 안내한다. 공시지가와 지번이라는 메마른 데이터가 평가하지 못하는 장소의 가치는 '배산임수,' '명당,' '조상의 땅' 같은 정서적 서사를 빌려 화려하게 꾸며진다. 실재를 증명할 수 없는 땅을 대신해 상상을 자극하는 이 매혹적인 언어들은 "통일이 되면 대박 나지 않을까?"라는 노골적인 유혹으로 관객을 현혹한다.

 

이처럼 현대사의 무게를 그럴 듯한 지표로 둔갑시키는 행태와 허황된 수사로 투기를 조장하는 기만은, 결국 분단의 역사적 무게를 휘발시키고 폭력적으로 추상화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특히 반재하가 퍼포먼스 〈제로선의 미래〉에서 역설하듯, 투기적 욕망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후유증을 황금빛 미래와 달콤한 약속으로 마취시킨다. 이는 비극적 현대사의 한 자락을 금융 포트폴리오의 한 줄로 전락시켜서라도 개인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지독한 신자유주의적 손익 논리와 폭력적인 점유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사진 2]

(앞) 이정, 〈Close Land〉, 2025, 가변 설치, 가변 크기, 혼합 재료. 아이스 카빙: 아이스신.

(뒤) 이정, 〈8 Lands, 8 Keepers〉, 2025, 8개의 다채널 영상, 자막: 정순영.

《DMZ에 땅을 사는 사람들》  전시 전경, A-O-Y, 서울, 2025. 사진: 직접 촬영.

전시는 여기서 나아가 DMZ 토지와 같이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음에도 투자 상품을 향한 증폭하는 투기적 욕망과 환상에 주목한다. 이정의 〈Close Land〉는 '닫혀 있음(Closed)'과 '가까움(Close)' 사이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계산하는 이 땅들이 처한 불확실한 현재에 대한 강력한 은유다. 빠르게 녹아내리며 형태를 잃어가는 대형 얼음 조각은 자본주의적 소유의 대상이 사실은 만질 수 없는 허상임을 폭로한다. 실재가 녹아 없어질수록, 그 땅을 가졌다는 '권리'에 대한 집착은 더욱 비물질적인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비물질적 점유의 논리는 편지지의 〈원산서핑클럽 2.0〉에서 NFT라는 디지털 투기 상품과 결합하며 정점에 달한다. NFT의 광풍이 불던 멀지 않은 과거, 구매한 상품에 물리적으로 가닿지 못한다는 것은 투자의 결격 사유가 아니었다. 실체가 없어도 시스템 상에 등록된 '권리'를 선점했다는 확신만 있다면 소유가 실재를 가볍게 추월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북한의 지식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법적 공백을 파고들어 가상의 '원산 서핑 클럽' 회원권의 NFT를 발행한다는 발상으로, 데이터라는 환상의 자본을 지탱하는 구조를 비판적으로 탐색한다. 결국 실체가 없는 가상 재화와 접근이 제한된 DMZ 토지는 모두 '소유'라는 언어적 상태만 남겨진 채 유통되는 동시대적 환상일 뿐이다. 작가들은 이 허구적 경제 구조에 침투함으로써, 실체 없는 기반 위에서 우리가 쫓는 소유의 개념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묻는다.

 

DMZ 지역의 부동산 투자라는 세속적 현안을 다층적으로 짚어보면서, 《DMZ에 땅을 사는 사람들》은 한반도의 분단 역사와 경제적 동력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내가 저 땅의 주인이라면?"이라는 질문은 어떤 이데올로기 교육보다 강력하게 개인을 분단 현실에 밀착시킨다. 지난 수십 년간 애국적 당위가 실패한 자리에 들어선 개인의 세속적 욕망은, 역설적으로 남한의 경제 발전을 가능케 한 추동력이기도 했다. 전시는 한국 사회의 광적인 부동산 투기의 기저에 있는 소유론적 욕망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며, 분단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솔직한 민낯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지독하게 불순한 동력이 어떻게 한반도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으며, 어떤 미래로 이끌고 있는지를.

집안일들: 어떻게 그것들과 살 것인가

Why Housework Never Becomes Collaboration: <Housework>

Review 글쓴이 박예린

왜 집안일은 협업이 되지 않는가: 《집안일들》

왜 집안일은 협업이 되지 않는가: 《집안일들》

 

연신내 유지원의 개인전 《집안일들: 어떻게 그것들과 살 것인가》(2025.10.29-11.19, LDK)는 가사 수행에 동원되는 사물들과의 관계를 네 개의 프로젝트로 재구성해 선보인다. 전시는 과거 대사관저로 사용되었던 2층 주택의 서재, 욕실, 침실, 주방을 가로지르며, 각 공간에 고유한 집안일과 사물의 관계를 배치한다. 사물의 관점을 발견하고 그것들과의 '협업'을 모색하려는 듯 보였던 전시는, 역설적으로 집안일이라는 현실 앞에서 인간의 노동이 사물의 행위성에 앞설 수밖에 없는 장면들을 반복해서 노출한다. 결과적으로 《집안일들》은 협업의 완성이 아닌, 그 개념이 번번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응시하게 만든다.

 

[사진 1] 연신내 유지원, 〈프린터에게 보낸 편지〉, 2022, 종이에 잉크젯, A4 3장. 《집안일들》 전시 전경, 사진: 필자 촬영.

 

2층 서재의 〈마이 리틀 프린터〉는 프린터를 회화 제작의 협업자로 호출한다. 여기서 프린터는 단순히 이미지를 출력하는 도구를 넘어 생산 과정에 개입하는 주체로 상정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기계와 인간의 의도가 동등하게 조율된다기보다는, 출력의 실패와 반복되는 어긋남을 통해 가시화된다. 프린터는 인간의 계획을 확장하기보다는 작업을 지연시키고 수정을 강제하는 조건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사물의 자율적 행위성을 증명하기보다, '협업'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인간의 판단과 형식 안에서 선별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 2] 연신내 유지원, 〈밤 샤워 #1-#4〉, 2024, 플라스틱 (폴리카보네이트에 아크릴, 레진, 폴리프로필렌), 84,29.7cm. 《집안일들》 전시 전경, 사진: 필자 촬영.

 

 감각과 세밀한 손짓을 요구하며, 때로는 샤워 도중 예기치 않게 시작되는 ‘화장실 대청소’라는 번거로운 행위까지도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과정이다. 변덕스러운 물의 온도와 미끄러운 바닥, 동선의 불편함은 몸의 의도를 끊임없이 간섭하며 의도와 결과 사이의 어긋남을 반복적으로 노출한다. 그리하여 이 작업이 최종적으로 소환하는 것은 사물의 자율적인 행위성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의 도움 없이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쉽게 소진되고 피로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적 기록에 가깝다.

 

[사진 3] 연신내 유지원, 〈초콜릿을 먹을 용기〉, 2025, 합성섬유에 아크릴, 건조대, 가변 설치.《집안일들》전시 전경, 사진: 필자 촬영.

 

2층 거실과 방 전반에 널린 대형 빨랫감들로 구성된 〈이불보를 씌우는 용기〉는 집안일의 ‘귀찮음’이라는 감각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전시는 관객이 어두운 방에 누운 채 영상 작업 〈인류는 왜 이불보를 씌우는 것을 망설이게 되었는가?〉(2025)를 감상하도록 안내한다. 이불보를 씌우는 행위는 기술적으로 복잡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미뤄지는 집안일이다. 영상은 이 귀찮음을 개인의 성실성이나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이불과 이불보, 몸의 움직임 사이에서 발생하는 동작의 행위성, 그리고 마찰과 불쾌감의 문제로 바라본다. 그러나 여기서도 사물과의 협업은 끝내 완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협업’이라는 거창한 말이 사소하고도 반복적인 집안일이라는 행위 앞에서 얼마나 효용성 있는 수사인지를 드러낸다.

 

주방에서 전개되는 〈협업적 레시피〉는 인간을 위해 작성된 요리 레시피를, 재료와 조리도구를 위한 문서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써온 레시피를 사물에게 건네는 이 전환은 분명 흥미롭다. 그러나 접시에 그려진 드로잉들로 제시된 결과물은 레시피라는 형식이 여전히 인간의 언어와 판단, 규율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프로젝트는 사물의 관점을 획득하기보다, 우리가 얼마나 강하게 규칙과 지침의 형태로 특정한 행위를 사물에 투사해왔는지를 되묻는다.

 

[사진 4] 《집안일들》 전시 전경, 〈협업적 레시피〉 프로젝트 부분, 사진: 필자 촬영.

 

이처럼 네 개의 프로젝트가 시도하는 '협업'은 완전한 결합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작가 개인의 방법론적 문제라기보다, 기획 자체가 맞닥뜨린 구조적 조건에 가깝다. 작가가 사용하는 회화, 드로잉, 글이라는 매체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손과 시선, 언어의 흔적을 강하게 남긴다. 그 안에서 사물은 언제나 인간의 형식을 빌려야만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사물과 동등한 관계'라는 지향은 윤리적으로 유효할지라도, 그것을 기록하고 의미화하는 주체가 인간인 한, 이 시도는 탈주체적이라기보다 주체성이 확장된 형태의 관계 맺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진 5] 《집안일들》 전시 전경. 사진: 필자 촬영.

 

전시 서문은 이 작업을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신유물론적 존재론의 기획으로 위치시킨다. 이러한 맥락화는 작가가 '협업'을 호출한 배경을 이해하게 하지만, 실제 전시가 작동하는 방식과는 다소 간극이 느껴진다. 과거 대사관저로 사용되었던, 위계적 공간 구조를 지닌 가정집인 이 전시 공간에서 집안일은 사물의 존재론적 문제이기 이전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직되어 온 인간의 몸과 노동의 문제에 가까워 보였기 떄문이다. 서문이 전시를 거대 담론의 대안으로 설명할수록, 가사가 지닌 반복성과 귀찮음, 노동의 구체적인 조건들은 다시금 추상화될 위험이 있다. 이 전시가 제공하는 진정한 힘은 거창한 거대담론에 의지한 철학적 성취보다는, 매일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실패와 어긋남을 소탈하게 드러내는 지점에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일들》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전시가 증명하는 것은 사물의 목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 앞에서 인간의 관점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재조정되는 순간들이다. 협업이 이상적인 균형으로 성취되지 않고 피로와 지연으로 귀결되는 지점, 바로 그곳에서 전시는 역설적으로 실재에 가까워진다. 이 실패는 이론적인 패배가 아니라 집안일이라는 현실이 지닌 정확한 조건에 가깝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공간과 노동의 역사, 그리고 집안일이 왜 끝내 매끄러운 협업이 될 수 없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전시는 새로운 존재론을 설파하기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왜 이토록 자주 '귀찮은' 것인지를 감각적으로 공감하게 한다.

피터 Peter

An Alibi of Imagination: <Peter>, Fiction in the Place Where History Was Erased

Review 글쓴이 박예린

상상의 알리바이: 《피터》, 역사가 소거된 자리의 픽션

상상의 알리바이: 《피터》, 역사가 소거된 자리의 픽션

 

고고학은 결코 중립적인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발굴과 수집, 분류와 명명이라는 행위를 통해 과거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 특정 유물에 지적 권위를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해 왔다. 고고학이 제국의 확장과 맥락을 같이하며 발전해 왔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세계 곳곳의 고대 문명 유적은 특정 권력의 주도하에 조사되었고,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서구 중심적인 지식 체계 안에서 재맥락화되어 박물관의 진열대 위에 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고고학은 오랫동안 서구 근대 지식 체계의 중심을 점유해 온 학문적 위치를 대변한다. 유예림의 개인전 《피터》의 회화 속에는 4만 3천 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피터’와 그를 둘러싼 고고학자 및 연구자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전시를 바라볼 때, 작품 속 장면들은 단순한 허구적 세계의 설정을 넘어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그림 1] 《피터》 전시 전경. 사진: 필자 촬영.

 

전시는 텍스트를 매개로 회화 속 인물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미국의 소도시를 연상케 하는 주차장, 옥수수, 비행기 등의 도상들에서 암시하듯, 그림 속 배경은 공통적으로 1960년대 미국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회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유골을 발굴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인물들은 미국의 고고학자 랄프 솔렉키와 그의 연구원들이며, 이들에게는 각각 데이비드, 하워드, 그레이엄, 테리, 폴 등 실존할 법한 이름들이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전시가 '피터'라 명명한 유골이 실제 미국인 고고학자 랄프 솔렉키(Ralph Solecki)와 컬럼비아 대학교 연구팀에 의해 발견된 '샤니다르 4세(Shanidar IV)'라는 실존하는 발굴물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950년대 이라크 샤니다르 동굴 발굴이라는 실제 사건이 지닌 지정학적 맥락이다. 솔렉키의 발굴은 풀브라이트 재단과 컬럼비아 대학교 등 미국의 거대 지식 기관의 지원 아래 수행되었다. 전시는 네안데르탈인 유골에 꽃이 헌화되었다는 가설로 유명한 이 기념비적인 고고학적 발견을, '피터'라는 지극히 서구적이고 친근한 가상의 이름으로 치환하며 픽션의 영역으로 재배치한다. 이 과정에서 실재했던 발굴의 역사적 구체성은 보편적인 픽션의 서사로 전환된다.

 

작품 속 등장인물과 사건을 가상의 것으로 다루는 전시의 설정은, 작품을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일정 거리 유지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이 작품 속에서 수행하는, 발굴하고, 기록하며, 바라보는 역할은 현실의 고고학적 수행과 밀접하게 맞닿은 채 인류학적 지식 체계의 방식을 충실히 재현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반복되는 주체의 위치가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수용된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권위를 점유해 온 시선이 픽션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다시금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지를 보여준다. ‘있을 법한 가상’이라는 설정이 현실의 지식 체계를 작품 속에서도 공고히 유지하는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게 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상의 세계를 그리는 목적이다. 상상은 대개 현실을 낯설게 보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동원된다. 그러나 만약 가상의 서사가 기존의 패권적 시선을 무비판적으로 투영하는 데 그친다면, 그 가상성은 예술적·윤리적 동력을 상실하고 자족적 서술에 머물 위험이 있다. 이때 상상력은 기존의 지식 구조를 전복하기보다 그 시선을 보호하는 유예와 면책의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

 

[그림 2] 유예림, 〈고고학적 마음 상태〉, 2025, 클레이, 천, 아크릴 물감, 165×140×50cm, 사진: 필자 촬영.

 

특히 고고학이 실증적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점은, 허구가 현실의 권위를 입는 효과적인 경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전시 공간인 보안여관 1942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엿보인다. 이곳은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이 축적된 구체적인 장소다. 작가가 미국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집행된 이라크 샤니다르 동굴의 발굴의 지정학적 맥락을 ‘피터’라는 유골의 시선으로 추상화했듯, 전시에서 보안여관 역시 장소가 지닌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성보다는 ‘오래된 시간’을 상상하기 위한 무대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다. 발굴 현장을 재현한 조각 설치 〈고고학적 마음 상태〉가 보안여관 전시장의 유리 바닥 아래 유구와 겹쳐질 때, 가상의 서사는 마치 실증적 증거를 얻은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실제 전시 장소가 가진 역사적 밀도는 희석되고, 가상의 고고학적 서사가 그 위를 덮게 된다. 이라크의 토양과 통의동의 시간은 각자의 구체성을 뒤로한 채, 전시의 배경이라는 모호한 차원에서 통합된다.

 

결과적으로 이번 전시의 회화들은 작가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소거하고 실제의 역사를 픽션으로 만듦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와 패권적 시선에 여지를 준다. 고고학적 시선이 품은 문제의식은 작품 이면에 암시되지만, (고고학적 유물을 다루는 학자들의 상상력의 부재에 대한 피터의 불평) 작품 자체에서 그것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시도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회화는 이 시선을 뒤흔들기보다 미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조형화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위치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나, 그 모호한 부재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중심적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속되도록 방조한다. 회화가 탈개인적인 형식을 취할수록, 우리는 어떤 시각이 우리 인식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된다.  《피터》에 등장하는 가상 혹은 현실의 주체들은 결국, 우리가 이미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세계의 질서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어쩌다 바하쉬는 앰버가 되었을까

<How Did Bahash Become Amber?>: A Strange Sanctuary for Names That Never Settle

Review 글쓴이 박예린

《어쩌다 바하쉬는 앰버가 되었을까》: 정착하지 않는 이름들의 낯선 안식처

[그림 1] 정지수, 워싱턴 국립문서보관소 소재의 청원서 사본과 한글 번역, 2025, 사진 전사, 디지털 프린트, 연필, 각 240×440×50cm. 보안1942 《어쩌다 바하쉬는 앰버가 되었을까》 전시 전경. 사진: 권태훈.

 

정지수의 두 번째 개인전 《어쩌다 바하쉬는 앰버가 되었을까》는 전시장 한쪽 벽면에 걸린 건조한 행정 문서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작가가 워싱턴 국립문서보관소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문서들로, 20세기 초 이주와 정착을 위해 국경을 넘어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거나 변경하고자 미국 이민귀화국에 제출한 개명 청원서이다. 슈코우스키(Shukowsky)로 살아가는 아들들과 성(姓)의 철자를 맞추고자 했던 자코츠키(Zakotsky)나, 형제들을 따라 성을 바꾼 채 살아가다 본래 사용하던 다이아몬드(Diamond)라는 이름과 행정상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투표권을 상실한 코헨(Cohen)의 사연이 그 예시다. 여섯 개의 청원 문서들을 통해 전시는 이름이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상하는 문화적 기호이기 이전에, 국민국가가 개인을 식별하고 관리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언어 체계’의 부속물임을 드러낸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발음 기호와 언어적 관습을 영어가 온전히 반영하지 못해 개명을 선택했던 이들의 존재는, 명문화된 언어에 의해 쓰이고 유지되는 법적 제도가 어떻게 개인의 실존을 누락시키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여기서부터 작업은 이주와 개명이라는 제도가 미처 포용하지 못한 문화적 누락, 그리고 기록된 문서에도 미처 담기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탐구해 나간다. 다만 주목할 점은 작가가 상실된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완벽히 복원하려 하기보다, 그 누락된 틈새를 사료가 아닌 예술적 상상력으로 기워낸다는 것이다. 전시는 개명 청원서 속 인물들의 사연에 살을 입히고, 오늘날 이주를 통해 이름을 바꾸게 된 이들의 인터뷰를 입체적으로 병치한 영상 작업 〈구르바〉(2025)를 통해 공식 역사가 놓친 새로운 서사의 틈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서사가 명문화된 기록이 아닌, 공기 중으로 휘발되는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행정화된 언어 이면에 누락되었던 개인의 역사는, 겹쳐지며 빗겨나가는 여러 명의 음성을 통해 비로소 생생한 실존을 획득한다. 4채널 영상 설치인 〈구르바〉의 매체적 조건, 즉 4채널 영상과 모듈 설치라는 형식, 그리고 분절된 상태로 흘러 나오는 이들의 사연은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완결된 서사에 도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 목소리가 중첩되고 이야기와 발음 기호가 서로 다른 화면과 구조물 사이로 끊임없이 전이되는 작품의 구조는, 이주민의 정체성이 결코 하나의 고정된 이름으로 수렴될 수 없음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한다.

 

개명과 이민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정지수의 작업이 섬세하게 다루는 지점은, 작가가 제도가 미처 포용하지 못한 문화적, 행정적 어긋남을 이야기하면서도 “언제까지나 더 나은 삶, 더 나은 국가라는 기나긴 꿈을 쫓고 있는” 이민과 이주에 대한 성장주의적 욕망과는 명확하게 거리를 둔다는 점이다. 스스로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아가는 이민자로서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노마디즘적 삶의 방식과 언어의 선택권이라는 특권을 반성하는 윤리적 태도로, 전쟁과 내전, 독재 등 사회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주와 개명을 감행해야만 했던 디아스포라 이주민 '바하쉬'와 '이사', 그리고 주체적으로 이름을 바꾸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 했던 '소니아 경아 정'의 사연들을 시공간을 가로질러 풀어낸다. 

 

그 중 하나가 청원서의 신청자 중 하나이자 이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살림 바하쉬의 경우다. 시리아 출신의 여성 ‘살림 바하쉬(Bahash)’는 시리아에서 여성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1912년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샘 앰버(Amber)로 이름을 바꾼다. 이러한 역사적 파편은 영상 속에서 현대의 이주민 바툴 이사의 인터뷰와 연결된다. 시리아 출신 여성 바툴 이사와 가족들은 이스라엘의 침공과 시리아 내전을 거치며 생존을 위해 성씨를 바꿔야 했고, ‘아이사’에 가까운 아랍어 발음을 영문 표기법으로 옮길 때 임의적인 행정적 판단에 따라 가족들의 이름이 ESSA, ISSA, EASA 등으로 각각 달리 표기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한국으로 넘어와서는 ‘바툴 이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또다른 목소리인, 헝가리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온 피터는 국가로서의 집은 자신에게 더이상 분명하지 않으며, 이제는 소중한 이들이 머무는 곳을 비로소 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시리아의 이사가 도달한, ‘삶에서 정착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실존적 자각과도 유사하다. 독재, 식민, 전쟁과 같은 폭력은 안온한 집이라는 관념을 해체했지만, 그러했기에 파괴된 자리로부터 삶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상태’ 그 자체로 수용하는 태도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 정체성이란 고정된 종착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며, ‘집’ 역시 국가적·행정적 구획을 가볍게 넘어선 심리적 연대의 영토로 재편된다.

 

여기서 작업의 제목인 ‘구르바’의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 아랍어 ‘구르바(الغُربة)’는 낯선 사람, 낯설어짐, 낯설게 되는 과정, 낯선 사람이 되는 것, 낯설게 만드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서구의 언어, 그리고 한국어로도 온전히 포획되지 않는 이 개념은 제도적 언어가 탈락시킨 존재의 공백이자 단어의 의미 그대로 알 수 없는 ‘낯선 상태(구르바)’를 기꺼이 껴안는다. 이렇게 전시는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틀 너머에서, 이주와 다양성이 만들어 내는 비효율적이고도 유연한 연결고리가 어떻게 연대의 정치적 가능성이 될 수 있는지를 꿈꾼다.

 

[그림 2] 정지수, 〈구르바〉, 2025, HD/4K 4채널 영상 설치, 18분. 보안1942 《어쩌다 바하쉬는 앰버가 되었을까》 전시 전경. 사진: 권태훈.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The Politics of Dependence, Apparatuses of Sensation: AMADO Art Space's <Dependent, Independent>

Review 글쓴이 박예린

의존의 정치, 감각의 장치들: 아마도예술공간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의존의 정치, 감각의 장치들: 아마도예술공간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전시는 시간과 공간을 빌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전시-만들기 혹은 큐레이팅이란, 작품이라는 감각을 시공간 위에 어떻게 배치하고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아마도예술공간, 2025.6.27-7.27, 신양희 기획)은 바로 이러한 감각의 분배라는 전시의 근본적인 문제를 전면에 놓는다. 다만 이 전시가 주목하는 지점은, 감각의 분배라는 미학적 행위를 자율적인 형식의 문제로 남겨두지 않고, 이를 막시즘의 정치적 비전과 직접적으로 접속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전시가 참조하는 오래된 막시즘의 통찰에서 시작된다. 그 결과 노동자로서의 인간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코끼리의 다리만으로 그 형태를 짐작하는 사람처럼 전체가 아닌 일부의 감각만을 경험하게 된다.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분업의 질서 속에서 은폐되고 분할되어 온 감각들을 전시 공간 안에서 다시 결합하고자 한다. 막시즘의 정치적 기획을 감각의 체계, 다시 말해 미학의 문제로 확장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일찍이 자크 랑시에르가 주목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권력이 부여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각자가 몸으로 세계를 감각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된다. 그러나 자신에게 할당된 몸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느끼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해방은 가능해진다. 그는 예술이 이러한 해방을 가능케 한다고 믿음으로써 미학과 정치를 연결지었다. 이때 랑시에르는 예술의 미적 체제, 즉 감각의 유희라는 기준으로 식별되는 예술이 예술 내부의 위계뿐 아니라 사회적 차별의 구조 자체를 교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몸의 감각을 예리하고 민감하게 일깨우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정치적 실천의 성격을 띨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 1] 김덕희, 〈레퀴엠〉, 2025, 파라핀 왁스, 염료, 철, 히터, 239×105×105cm.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전시 전경. 사진 © 아마도예술공간.

 

랑시에르의 사유와 겹쳐지는 지점에서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은 시각을 포함한 다양한 감각들을 전시 공간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서 억압되고 소외된 자들의 해방을 꿈꾼다. 빛, 열, 소리, 움직임을 매개로 한 예술 작품들과 시공간에 잠재하는 감각들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신체를 매개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감각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감각은 생리적 자극의 의미를 넘어서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분절되어 온 몸과 세계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예컨대 김덕희의 작품들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파라핀 왁스로 제작되었다. 석유계 물질인 파라핀은 현대 문명 발전의 동력이자 국제 정치·경제적 패권의 상징성을 암시한다. 고체에서 액체로, 다시 기체로 상변화하는 파라핀의 물성은 안정성과 불안정성, 견고함과 유동성을 동시에 지닌 자본주의 체제의 다면적인 성격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림 2] 오민수, 〈손가락들〉, 2025, 천, 아두이노, 레일, 스피커, 가변 크기.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전시 전경. 사진 © 아마도예술공간.

 

또다른 예로, 이수진의 〈엇각의 늪〉(2025)과 〈NQ Tower〉(2025)는 인간의 노동요와 공장 기계음 사이의 친연성을 주제로 한 설치 조각 작업이다. 공장이나 작업장의 소리를 연상시키는 규칙적인 기계의 박동 속에는, 묘하게도 인간의 숨소리와 닮은 리듬이 숨어 있다. 집단 노동을 통해 생산된 곡물들과 파이프, 나사, 배기구 등 다양한 공업 기구들에서 나는 소리들이 뒤섞여 고유의 리듬을 만들어 낸다. 파이프가 부딪히는 소리, 벨트 컨베이어가 굴러가는 소리, 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계음 속에 노래소리로 반복되는 인간 노동자들의 하루가 겹쳐진다. 한편 경기도 화성시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로 사망한 국내외 노동자 23명의 죽음을 모티프로 한 오민수의 〈손가락들〉(2025)은, 시신의 손가락조차 온전히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고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업이다. 형태와 색채도 없는 허공을 가로지르며 서서히 움직이는 흰 천의 움직임은, 기록되지 못한 노동과 말해지지 못한 죽음을 불러낸다. 흰 천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바람의 미세한 떨림에, 공허한 감각으로만 남은 슬픔이 배어 있는 듯하다.

 

안성석의 〈바깥으로 나가서 확인해 봐야겠어요〉(2025)는 멀리 뻗어나가는 서치라이트의 빛을 통해, 이러한 문제 제기가 전시 공간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의 세계로 확장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특히 서울 한복판의 부촌이자 소비 자본의 상징적 공간인 한남동, 그 중심에 위치한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이 빛은 더욱 멀리 뻗어나간다. 안성석의 작업이 보여주듯 전시는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적 비판에 머무르기보다, 이 체제 안에서 현실을 다시 사유하고 변화시키려는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 특히 전시 기획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기대어 살아가는 방식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음을 강조한다.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전시는 노동자와 기계, 개인과 시스템처럼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서로 의존하면서도 불편한 관계를 맺는 존재들을 예술의 장 안에서 다시 마주하게 한다. 여기서 감각은 결코 단절된 개인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시 공간에서 무언가를 감각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연대이자 애도이며 질문이 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는 모든 일은 세계를 다시 배치하는 작은 정치적 실천일지도 모른다. 전시는 이러한 사실을 말로 설명하기보다 감각의 경험으로 조용히 드러내 보인다.

 

[그림 3] 권은비,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 2025, 아크릴, 철, 모터, 와이어, 스포트라이트 조명, 가변 크기.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전시 전경. 사진 © 아마도예술공간.

 

권은비의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 (Allegorie des neuen Engels)〉(2025)는 우리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고 있음을 감각의 차원에서 다시 상기시킨다. 두 개의 반투명한 톱니바퀴는 천천히 회전하며, 전시장 입구의 창문 밖에서 행인들의 눈이 부시도록 여름 햇빛을 분산시킨다. 이 느린 움직임은 전시 공간의 안팎을 가로지르며 인간의 시간과 기계의 리듬, 노동과 감각의 톱니가 서로 맞물리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톱니바퀴 표면에 새겨진 도상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1920)에서 영감을 받아, 톱니바퀴의 부품처럼 소모되는 노동자들의 몸을 응시하는 새로운 천사의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특히 이 작업이 게슈탈트(Gestalt) 조형의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여기서 전체는 개별 부분의 총합이 아니라, 각 부분들 간의 관계와 맥락을 파악할 때만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림 3] 김덕희, 〈캐논〉, 2025, 파라핀 왁스, 석고, 히터, 가변 크기. 사진: 필자 촬영.

 

이러한 관계적 감각은 관람객의 신체와 직접 맞닿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김덕희의 〈캐논〉(2025)은 쪽방촌의 주거 공간을 연상시키는 작은 정방형 공간 바닥 전체에 이르는 작업이다. 하얀 벽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동일한 색의 파라핀 왁스가 흩뿌려진 바닥 한가운데 손목까지만 제작된 흰색의 손 조각이 놓여 있다. 관람객은 이 공간 안으로 직접 들어가 손을 뻗어 조각을 만질 수 있다. 차갑도록 하얀 손을 가만히 잡고 있으면, 뜻밖에도 미세한 온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뜨겁지는 않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있는 누군가의 온기이다. 이 온기는 관람객의 손에서 작품으로, 다시 관람객에게로 전달된다. 

 

[그림 4] 오로민경, 〈선물, 선물 시간 가게 - 작은 빛 노래〉, 2025, 오르골, 자가발전기, 빛 센서, 혼합 매체, 70×50×30cm, 가변 크기. 사진: 필자 촬영.

 

오로민경의 〈선물, 선물 시간 가게〉(2025)는 돈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세계와는 다른 교환의 질서를 제안한다. 선물 교환을 통한 호혜적 경제를 만드는 포틀래치(potlatch)를 연상시키는 이 작업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선물과 대화로 채워진 공간이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관람객의 목소리에 반응해 미세하게 진동하는 깃털, 어두운 밤 난민 캠프의 불빛을 대신하며 생명을 노래하는 LED 오르골. 이 모두는 멀리 떨어진 이름 모를 타자들과의 연결을 상상하게 한다. 조용하고 어두운 전시 공간 안에서 다른 이들을 향해 뻗어나가는 이러한 감각의 경험은 우리가 무엇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그걸 잊고 단절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이 전시에서 '의존'은 선택 가능한 윤리나 이상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끝내 회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주어진다. 전시가 요청하는 것은 그 조건에 부응하라는 윤리적 명령, 혹은 랑시에르적 의미에서의 윤리적 체제가 아니라, 그러한 조건을 감각적으로 인식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는 불편함과 질문을 계속해서 느끼는 일에 가깝다. 손을 잡았던 온기, 빛으로 확장되던 시선, 공간을 진동시키던 목소리를. 그래서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이 마침내 도달하는 지점은 완전한 연대의 회복이나 새로운 공동체의 약속이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미 수많은 타인의 존재와 그들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단절된 채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조용히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전시는 세계를 바꾸는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세계를 기민하게 감각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관람객을 돌려보낸다.

김옥선 개인전 《옥선 혜림 인선》

Even If Trivial Records Never Become History: Kim Ok-sun Solo Exhibition <Oksun Hyerim Insun>, Recalling the Shadows Held in the Gaps

Review 글쓴이 배진선

사소한 기록들이 역사로 거듭나지 못하더라도: 김옥선 개인전 《옥선 혜림 인선》, 그 사이 공백에 담긴 그림자들 떠올리기

사소한 기록들이 역사로 거듭나지 못하더라도: 김옥선 개인전 《옥선 혜림 인선》, 그 사이 공백에 담긴 그림자들 떠올리기

 

지구적 제휴 정치의 그럴듯함에 대한 믿음은 매판 국가에서 ‘국제적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지배적 사회 집단 여자들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다. 그러한 저울의 맞은편 끝에 있는, “여자들, 죄수들, 징집된 군인들, 환자들, 동성애자들” 사이의 제휴 가능성에서 가장 동떨어진 사람들이 바로 도시 하부 프롤레타리아 여자들이다. 그들의 경우 소비주의나 착취 구조의 부인과 철회는 가부장적 사회 관계들에 의해 더욱 복잡해진다. (국제 노동 분업의 맞은편에 있는 착취의 주체는 여성 착취의 텍스트를 알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설령 여성에게 말하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자신은 나서지 않겠다는 부조리한 지식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성은 이중으로 그림자 속에 있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로잘린드 C. 모리스 엮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태혜숙 옮김(서울: 그린비, 2013), 441. 

 

김옥선 개인전 《옥선 혜림 인선》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서울. 필자 촬영.

 

2025년 어느 가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두 전시실에서, 한국 현대사의 문제들을 일깨우는 세 여성을 소개한다. 김옥선 개인전 《옥선 혜림 인선》은 사진과 영상, 포스터와 메모 등 개인 기록을 오가는데 일견 역사 박물관 전시를 떠올리게 한다. 형식보다는 방식이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데, 어떤 중요한 인물들의 기록을 비추며 역사에 관심 갖게 하기 때문이다.

 

김옥선이 주목하는 세 여성은 역사에 편입되지 못할 정도로 기록 없는 인물들은 아니다. 그들은 스피박이 라지니트 구하를 빌려와 정리했던 엘리트 범주의 세 번째 단계로, “지방·지역 수준에서 지배적인 토착집단들”1)이다. 1934년 충남 서천군에서 태어난 김옥선은 20세기 중후반, 두 독재 정권에서 세 차례 고향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이미 10대 후반에는 고향에서 모자원을, 20대에는 원산도와 장항에 학교를 설립했던 지역 유지였다. 한국에 온 헤리엇 페이 핀치백었던, 문혜림이 결혼으로 연을 맺은 남편은 일제 시기에는 북간도 명동촌 한인촌 공동체를 이끌던 장로교 목회자 부모를 두고, 교수와 국회의원을 지냈던 인물이다. 김인선의 배경은 그녀의 수필과 작가의 영상작업으로 알려진 내용으로만 어려운 유년을 보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다만, 그 역시 파독 간호사로 근무하며 역경을 이겨낸 끝에 호스피스 단체 ‘동행’ 대표로 활동하며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전체를 놓고 보면 온전히 지배적인 집단에 결코 속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서발턴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위치에 선 세 여성은 보다 위에 위치한 지배집단의 위계나 이해관계를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돌봄으로 나아가기에, 전시는 스스로 말하거나 역사로 구성될 만큼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익명의 여성들에게까지 나아간다. 옥선의 무료 교육원, 혜림의 두레방, 인선의 호스피스 단체 모두 기독교 성격을 띈 단체들이다. 그들이 혼자 잘 사는 이익보다 함께 돌보는 길을 선택한 데에는 종교가 어느 정도 역할을 발휘했을 것이다. 피식민지배 경험을 가진 국가들의 난제는 과거로 무작정 회귀하지 않은 채 서구라는 근대가 들여온 보편적인 이상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성에서 벗어나더라도 의미 있다고 느끼는 감정들, 타인을 돌보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어쩌면 서구 기독교 정신의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영상 작업 <oksun hyrrim insun>(2025)에서 기독교를 다루는 방식은 흥미롭다. 밝게 개방되어 처음 들어가게 되는 갤러리 2에서는 웨딩 드레스를 입은 혜림의 작은 사진, <혜림의 폐백, 결혼, 입국> 뒷면에서 직접적으로 그 시대에 흔치 않은 동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결혼이 종교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하고 두레방 활동 역시 민중목회 활동으로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옥선의 교육기관 설립은 강렬한 선거 포스터와 열정적인 의정활동에, 인선의 호스피스 운영은 파트너 수현과의 반짝이는 관계에 시선을 더욱 옮겨가기에, 이들의 돌봄 활동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까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영상에서 옥선과 보좌인 공순, 혜림과 딸 영미, 인선과 연인 수현의 말들이 구체화되고 돌봄과 만남에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음은 더욱 분명해진다. 종종 기독교를 다룬 미술이 (비판이든 찬양이든) 교회를 중심 주제로 다루거나 개인의 신앙심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김옥선의 작업에서 기독교는 그저 부차적인 도구처럼 이야기된다. 인선과 수현이 연애를 시작했던 만남의 장, 에벤에셀 모자원 또는 두레방을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무언갈 나눌 수 있는 돌봄의 원동력으로 다뤄질 뿐이다. 동시에 카메라는 말하는 여성들 너머 풍경과 사람까지 넓게 비추고 영상 프레임에 담긴 과거 사진은 크기를 구분짓지 않고 인물을을 담아내며 종교의 무게는 커지지 않고 그저 사실로서만 언급된다.

 

결국 더 많은 여성들이 드러난다. “서발턴 여성들은 그 서사에서 불충분하게 재현되고 있거나 불충분하게만 재현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검토할 수 있지만 결코 파악할 수 없다.”2) 두레방을 찾아 빵을 만드는 기지촌 여성들, 부모의 반대에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무료 교육원을 찾는 소녀들,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정리하고자 하는 이주민들. 아직 스스로 발화할 시간을 얻지 못한 이들은 어쩌면 김옥선의 작업에서 ‘불충분하게만 재현’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작가 역시 이를 인식하듯, 개인전 제목 《옥선 혜림 인선》에서 세 여성들 사이를 쉼표로 방점 찍지 않고 남겨둔다. 그렇기에 비어진 공백 사이로 그 곁에 자리잡았다 흘러가는 많은 여성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다정하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탄식어린 논의가 결국 자명해 보이는 세상이 막막해 무력감과 좌절에 가까워질 때, 김옥선의 작업을 되짚으며 희망을 되뇌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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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덧붙여 김옥선이 담아낸 여성들에 느꼈던 사소한 기쁨을 고백하자면, ‘인선’과 수현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다가왔다는 것이다. 파독 간호사이자 한국 1세대 퀴어 커플인 김인선과 이수현은 반박지율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으로도 알려져있다. <두 사람>을 봤을 때 인선과 수현은 척박했던 시기에 모험을 감내하며 삶과 사랑을 일궈간 존경스러운 인생선배로 다가왔다. 그리고 몇 년 후, 김옥선 개인전에서 크고 작은 사진 속 인선과 수현은 멈춰 서서 응시해야 했기에 그들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땅딸막하고 살찐 몸, 항암으로 빠졌을 머리카락, 안경 렌즈로 인해 더 작아졌을 눈. 통념적인 미의 기준에 벗어나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꾸미고 더하지 않은 채로도, 아름답고 위엄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야말로 사진을 보며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1)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432.

2) 같은 책, 43.

 

문을 만드는 일

Prying Open the Door and Tracing the Cracks: Park Mi-ra Solo Exhibition <The Work of Making Doors>, Sinking Toward the Future

Review 글쓴이 배진선

문을 벌려 균열을 짚으며: 박미라 개인전 《문을 만드는 일》, 미래를 향해 가라 앉기

문을 벌려 균열을 짚으며: 박미라 개인전 《문을 만드는 일》, 미래를 향해 가라 앉기

 

“오늘 밤, 이 땅에 강렬한 빛이 비추었고 그것은 쐐기가 되어 섬 전역에 균열을 새겼다!”

스튜디오 가가, 미우라 켄타로 원작, 모리 코지 감수, 『베르세르크』 42권, 김태형 옮김(서울: 대원씨아이), 66.

 

박미라의 환상세계는 시작부터 다른 차원을 오가리라 예고한다. 더 레퍼런스 입구의 〈융점〉(2025)은 환상으로 나아가는 길목을 구분하는 경계석처럼 걸려있다. 화면에서 겨울 밤이 비춰지는데, 밤 하늘과 달, 구름, 나무, 집, 쌓여 있는 눈 덩어리와 내리는 눈송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화소로 픽셀화 된 채 풍경을 이룬다. 눈 내리는 속도만은 일정하다. 그러나 부릅뜬 눈이 눈송이들을 뚫고 보다 가파른 속도로 떨어질 때에야, 우리는 이질감을 느끼며 같은 속도로 숨어든 감은 눈까지 포착해내며 기묘함에 휩싸인다. ‘융점’은 앞 글자에 어떤 한자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이해된다. 녹을 융(點)을 쓴다면 “고체가 액체 상태로 바뀌는 온도”라는 의미이며, 병장기 융(戎)이라면 “영문(營門, 병영의 문)의 군사를 훈련하는 일”을 뜻한다. 자연의 법칙을 따라 눈을 녹을 수 밖에 없기에, 작품을 녹는 점과 연결시키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블록에 단단히 갇혀 스쳐가는 눈송이를 바라보다 마주친 눈동자에 느끼는 기묘한 이질감은 불안을 동반한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어떠한 감각을 연마해야 하는 것일까?

 

〈미래의 연대기〉, 2025, 드로잉 애니메이션, 4분 45초,  《문을 만드는 일》 전시 전경, 더 레퍼런스, 서울. 필자 촬영.

 

다시 시작하길 꿈꾸며, 세계의 경계에 바쳐진 제물들

박미라는 어두컴컴한 지하에 흰 빛을 내리 쬐며 이세계로 향하는 틈새를 벌린다. 문이 제단 위에 놓여 빛난다. 백미러가 좁은 틀 사이로 엷은 시선을 노출하고 평범해보이는 머그컵은 광채를 머금고 성배처럼 번뜩인다. 저 멀리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무언가 번뜩이는 것을 탐색하고, 주렁주렁 전구를 매단 심장은 맥박치듯 빛난다. 일찍이 『베르세르크』의 해골기사가 어떤 환상계를 향해 경고하지 않았던가. 땅에 비춘 빛이 쐐기가 되어 섬 전역에 균열을 새겼노니. 박미라가 세워둔 문이 열리게 된 순간에도, 잠자던 눈들은 감시를 시작하며 균열을 인식한다. 

 

우리는 〈융점〉을 넘어 계단을 듣고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하지만 〈미래의 연대기〉(2025)가 열어두는 문은 엘리베이터로 보다 빠르게 환상들을 실어 보낸다. 내 경우에, 섬세한 선으로 세밀하게 펼쳐진 세계에서 우연히도 먼저 만난 화면은 귀여운 토끼 인형과 눈사람, 화분들이 떠다니는 모습이었기에, 사랑스러운 추억을 열어두는 섬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이내 날개달린 외눈과 촉수달린 뇌가 부유하며 등장한다. 〈미래의 연대기〉는 우리를 리셋을 원하는지 물어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키를 쥘 수 있으리라 희망을 주고서 문이 열리는 시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을 미래는 환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조각난 파편들로 가득한 미지일 뿐인 것이다.

 

제단에 우뚝 선 〈미래의 연대기〉를 감싸며 흩어진 사물들은 저마다 조각난 신체를 품은 작업들이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2025)은 각기 다른 차원에서 눈, 코, 입 (혹은 점과 콧수염까지?)을 잘라내 얼굴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조립하고 있고, 맞은 편에서 〈뒷미래〉(2025)는 제목에 쓰인 접두사와 대조적으로 표류하는 존재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온다. 〈자동심도검사〉(2025)에서 매끄럽고 새하얀 손은 돋보기를 들고 화면을 관찰한다. 촉수 달린 외눈 아래 펼쳐진 조각난 신체들은 도넛인지 튜브인지 모를 물체에 낑겨 트랙처럼 보이는 지대에 떠다니는데, 이 화면은 규제봉 사이 끝없는 터널, 문이 열리며 쓰러지는 과녁과 교차된다. 〈간지러운 빛〉의 화살표의 명령에 따라 심장의 전구들이 켜졌다 꺼진다. 

 

불가해한 환상들은 박미라가 자아내는 선을 따라 존재를 갖춘 뒤, 《문을 만드는 일》 곳곳에 펼쳐지는 연대기들에서 출몰한다. 장갑 낀 개미는 무거운 바위를 지게꾼은 벽돌을, 자전거 라이더는 신체조각과 장기를 옮긴다. 방독면을 쓰고 일하는 사람 사이로 감시하는 눈알들이 맴돈다. 커다란 뇌는 빅브라더 마냥 감시창이자 추억을 강탈한 금고를 여러 개 머금고 하늘을 떠다닌다. 이들은 언뜻 시공간 모두가 멀리 떨어진 신비로운 고딕처럼 보이지만 그저 현실을 극적으로 번안한 세계이기도 하다. 

 

영토를 벗어나 가라앉는 미래가 드러낼 수 있는 균열

동시대 애니메이션들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구현되는 차원이 2차원이든 3차원이든, 기술의 편리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더욱 매끄럽고 화려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사이로 박미라가 움직임을 부여하는 세계는 어딘가 삐걱거린다. 그에게 대상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감시카메라를 쓴 머리만 꺼덕거리는 새와 흐르지 않는 뻑뻑한 강을 밀고 나아가는 사신의 배. 이렇게 작가는 환상적인 존재들을 부분적으로만 움직이게 하며 자연 법칙에 모순을 더하고, 그것들을 이루는 세계가 얼마나 불온하고 기묘한지를 전한다. 

 

그렇기에 박미라의 작업들은 20세기 잉크를 묻힌 펜촉으로 빼곡하게 새겨낸 흑백만화의 환상 세계를 이어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고딕스럽게 세계를 밀고 나아가며 미래를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물며, 정해진 미래를 거슬러 계속해서 새로운 연대기를 상상하고 감각해야 할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세계에 도달한 3차원 유기체의 몸을 가진 우리는 박미라가 문을 만들어 열어둔 세계의 우연한 불시착자인가, 아니면 미지를 지배하러 온 정복자인가.